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벌지 전투 (문단 편집) == 작전 준비 == 여러 장성들이 가을 안개 작전에 부정적이었지만, 히틀러는 반대 의견을 모두 받아들이지 않고 세부적인 작전 계획을 세우라고 명령하였다. 히틀러는 작전 계획의 모든 세부 사항, 심지어 폭격 시간까지도 직접 결정하였다.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 이후[* 흔한 인식과 달리 히틀러가 독일군 장교단을 무시하고 밀어붙일 수 있었던 것은 저 사건이 계기가 되었다. 전쟁 중반까지는 오히려 참모들의 의견을 듣고 현장의 상황을 살피면서 판단했고 그 이후에도 장교단이 단체로 반대하거나 잘 설득하면 받아들였다. 물론 모스크바 공방전 이후로 서서히 국방군 장성, 장교들에 대한 불신이 쌓인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원로 장성들조차 히틀러의 눈치를 보는 상황에서도, 꿋꿋하게 총통에게 반대하며 '작은 해결책'을 마련하려 애쓴 것은 B집단군 사령관 [[발터 모델]]과, 새로이 5기갑군 사령관에 임명된 [[핫소 폰 만토이펠]] 기갑대장이었다. 10월 말, 오랜 참모장인 한스 크렙스를 통해 아르덴 대공세의 작전안을 전해 받았을 때 "나한테는 말야, 이 모든 게 박살난 목발로 서 있는 것처럼 보여." 라고 독설을 퍼부었던 모델은 "한 가지 조건만 충족된다면 뫼즈 강에는 도달할 수 있다." 라고 자신한 만토이펠과 3년 전의 악연부터 청산한다. >만토이펠 장군이 모델 원수에게 보고하러 왔을 때, 모델의 집무실엔 손에 잡힐 듯한 팽팽한 긴장감이 느껴졌다. 1941년의 모스크바 전투 당시 만토이펠 중령은 군단장이었던 모델의 명령을 거부했다가 군법 재판에 회부될 예정이었으나, 회부 직전 그의 직속 상관이 만토이펠을 서부전선으로 전임시키면서 도피에 가깝게 동부전선을 떠나야 했기 때문이다. 그날 이후 만토이펠은 모델과 만난 적이 없었으니 이러한 갈등을 해명할 기회조차 없었다. >모델은 냉정한 시선으로 긴장한 모습의 만토이펠을 바라보았다. "우리 두 사람은 동부전선에서 불화가 있었지." 만토이펠이 이를 수긍하자 모델이 말을 이었다. "이제 끝난 이야기네. 지금 우리에겐 반드시 함께 완수해야 할 임무가 주어졌으니."[* The Ardennes, 1944-1945: Hitler's Winter Offensive] 그날로 만토이펠은 서부전선에서의 독일군 개편에 총력을 기울일 수 있었고 모델과 함께 뫼즈 강 도달을 목표로 하는 '작은 해결책'을 준비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기존의 작전명인 [[라인 강의 수비]](Wacht am Rhein)는 가을 안개(Herbstnebel)로 변경된다. 독일군은 동부전선에서 병력들이 속속들이 도착하고, 그 동안 반격 작전을 위해 아껴두고 숨겨둔 항공기들을 모조리 긁어모으고, 마지막 있는 연료와 탄약까지 거의 다 긁어모아 작전 준비가 척척 진행되었다. 기갑사단의 경우 SS 소속 5개 기갑사단과[* 제1 SS 기갑사단 "LSSAH", 제2 SS 기갑사단 "다스라이히", 제9 SS 기갑사단 "호엔슈타우펜", 제10 SS 기갑사단 "프룬츠베르크", 제12 SS 기갑사단 "히틀러 유겐트"] 국방군 소속 5개 기갑사단[* 기갑교도사단, 제2기갑사단, 제9기갑사단, 제11기갑사단, 제116기갑사단]을 합해 10개가 동원되었다. 이들 사단들이 보유한 전차와 돌격포, 구축전차를 다 합하면 1,000대 이상에 달했다. * 기갑교도사단: 4호 27대+판터 30대+구축전차 20대 * 제2기갑사단: 4호 28대+판터 64대+돌격포 35대 * 제9기갑사단: 4호 28대+판터 60대+돌격포 24대 * 제11기갑사단: 4호 61대+판터 47대+돌격포/구축전차 19대 * 제116기갑사단: 4호 26대+판터 64대+구축전차 25대 * 제1 SS기갑사단 "LSSAH": 4호 37대+판터 42대+돌격포/구축전차 22대 * 제2 SS기갑사단 "다스라이히": 4호 28대+판터 58대+돌격포/구축전차 48대 * 제9 SS 기갑사단 "호엔슈타우펜": 4호 32대+판터 58대+돌격포/구축전차 28대 * 제10 SS 기갑사단 "프룬츠베르크": 4호 36대+판터 35대+돌격포/구축전차 30대 * 제12 SS기갑사단 "히틀러 유겐트": 4호 37대+판터 41대+돌격포 22대 여기에 1944년 12월 기준으로 72대의 4호 전차와 38대의 판터 전차, 8대의 4호 구축전차를 보유하고 있던 제21기갑사단도 고려되었으나 결국 투입되지 않았다.[* 출처: Jentz, Thomas (1996). Panzertruppen: The Complete Guide to the Creation & Combat Employment of Germanys Tank Force 1943–1945. Schiffer publishing, Cole, Hunge M.(1965). The Ardnness: Battle of the Bulge] 이 외에도 SS 제501 중전차대대, 제506 중전차대대, 제559 중구축전차대대, 제560 중구축전차대대, 243 돌격포여단 등 여러 전차부대들이 동원되었고[* 이들 부대 상당수는 기갑사단에 예속되어 지휘를 받는 상태로 전투를 수행했다.] 이렇게 동원된 기갑사단과 독립전차부대들의 차량 수는 1,400여대 정도였다. 그리고 연합군의 후방을 교란하기 위해 [[공수부대]]와 함께 [[오토 스코르체니]] SS [[보병]][[중령]]이 이끄는 위장 부대 역시 준비되고 있었는데, [[영어]]를 할 줄 아는 [[장병]]들을 미군 군복을 입히고 미군 장비를 사용해 미군의 후방을 기습하는 작전이었다.[* 따라서 스코르체니 특공대원들은 [[스파이]]였고 [[제네바 협약]]의 보호를 받을 수 없었다. 연합군에게 포로가 된 대원들은 전부 총살형 혹은 교수형에 처해졌다. 1965년작 '벌지 대전투'에서도 그들을 두고 잡히면 스파이로 처형, 살아남아도 반역자로 처형될 것이라는 대사가 있다. 이들의 존재가 밝혀지자 미군은 "미키 마우스의 여자친구는?", ""일리노이 주의 주도는?" 등의 ~~말 그대로 모르면 간첩~~ 질문을 내면서 스코르체니 부대원들을 색출하려고 했지만, 정작 '''문제를 내는 헌병들도 답을 몰라서''' (가령 일리노이 주의 주도는 [[스프링필드(일리노이)|스프링필드]]지만 많은 수가 [[시카고]]로 착각하고 있었다), 정답을 말했는데도 '너 간첩이지' 하고 잡혀가는 사례가 속출하는 촌극이 빚어졌다. 그 중 가장 유명한 사람이 다름아닌 '''[[오마 브래들리]]'''였다. ] 심지어 노획한 미 육군 전차로 위장한 기갑 부대까지 투입한 상당한 규모였다. 이런 준비에도 불구하고 병력과 장비는 한참 모자랐고, 결국 2~3선급 [[국민척탄병]] 부대들이 정예병들의 빈 자리를 채워야 했다. [[루프트바페]] 공수부대 강하를 위한 집결도 문제가 많았는데, 사실상 보병이 되어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공수부대를 집결시켜서 비행장으로 가려 했으나, 이들을 태워야 할 트럭에 기름이 없어서 못 가는 황당한 사태도 벌어졌다. 지상군의 작전에 맞춰 준비된 [[루프트바페|공군]]의 [[보덴플라테 공세]] 역시 신무기인 [[Me 262]] 등이 갖춰졌으나 조종사들은 비행시간도 얼마 안되는 사람들이 많았다. 작전 개시일에서 고작 2주 전인 12월 2일, 여전히 모델과 만토이펠은 안트베르펀 점령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강조하며 '작은 해결책'을 제시했지만 히틀러는 재차 이를 거부했다. 그나마 변경된 점이 있다면 초기 작전 목표대로 공세를 시작하나 진행 과정에서 안트베르펀 점령 확률이 낮아질 경우에는 작은 해결책으로 작전 목표를 전환한다는 것, 그리고 [[알프레트 요들]] 장군과 히틀러의 초기 작전안에서의 공격 시간인 오전 11시를 새벽 5시 30분으로 앞당기는 것이었다. 이처럼 독일은 이 작전이 실패하면 더 이상의 그 무엇도 불가능할 만큼 여력을 쥐어짜서, 초기 작전 지역의 미 육군을 압도하는 규모의 공세 병력을 집결시켰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